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순천 10.19 사건 (문단 편집) == 이승만 정부의 반응 ==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가 [[6.25 전쟁]] 이전부터 [[치안유지법]]을 [[국가보안법]]으로 개정하고 강경한 [[반공주의]] 성향의 국가를 구축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박정희 정권과 이후 군사정권 기간 내내 철저한 반공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근거로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었다. 정부 측의 학살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역사학계에서 공공연하게 밝히기 시작한 것은 [[2008년|거의 60년이 지난 후]]였으며, 그 전까지 교과서는 물론 모든 매체에서 일방적으로 반란군의 탓으로 돌려왔다. [[이범석]]은 이게 극우와 극좌의 합작이라고 발표했다.[* 극우 부분은 박정희가 집권한 후에 삭제되었다. 어찌됐건 간에 본인 입장에선 흑역사니 그럴 만도 하다. 이범석 자신은 독립군 출신에 극우 성향에 가까운데 극우의 책임을 명기한 이런 발표를 낸것 자체가 의외다. 여기서 말하는 극우는 정확히 말하면 이승만이 아닌 김구 계열을 암시한다. 내부 정쟁에서 김구 계열을 공격하기 위한 발표인 셈.] 그래서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8_1948_10_19_0070|당시]]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8_1948_10_28_0080|국회]]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9_1948_12_08_0190|속기록]]에도 나온다. 이걸 가지고 김구가 여순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둥 루머가 퍼져나갔다. 김구 암살 관련 미 [[https://archive.ph/ING2|정보문건(.)]]을 보면 김구, 염동진은 우익 반대파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고 한다. 역사편찬위에서는 염동진과 몇몇 장교들의 발언'''만''' 가지고 하는 거라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현재에는 여순사건의 극우 연루설은 폐기된 상태다.] 심지어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이승만에게 대항하여 출마한 [[최능진]] 전 미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과 백범 [[김구]] 선생 계열로 48년 9월 29일 해임된 오동기 전 14연대장(광복군 출신)을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조작하여 구속했는데, 이 사건과 뒤섞어서 여순반란 사건의 총책은 최능진과 오동기라는 괴랄한 결론을 내린다. 이에 최능진은 사형, 오동기는 징역 10년을 받았다. 상술했다시피 김지회는 적색장교로 분류되어 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이라는 요직에서 대전차포중대장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를 지시한 사람이 당시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었다. 오동기 소령은 직접 상경하여 군 고위층에 김지회의 구속 건의까지 하였지만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장교를 함부로 구속하느냐고 하여 허위로 몰아간 적이 있다. 이런 그에게 반란의 주모자라고 하니 본인은 환장할 노릇이다. 결국 여순 반란이 북로당+[[소련]]의 지시라고도 하고 싶고, 정치적으로 눈에 가시인 김구의 지시라고도 하고 싶으니 결국 이걸 짬뽕하여 극좌와 극우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일으킨 사건이라는 결론. 이 사건이 북로당+소련의 지시인지, 자신의 세력 약화에 조급해 했던 박헌영이 독단적으로 일으킨 남로당 이현상을 통해 일으킨 사건인지, 친일경찰과의 불화와 제주도로 출동을 거부한 14연대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인지 등 이견이 있었다. 다만 확실한 건 김구가 북측과 짜고 일으킨 우익 [[쿠데타]]라는 것이나, 북한측에서 주장하듯 박헌영이 미군과 짜고 군내 세포조직을 소멸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어째 [[극과 극은 통한다|극우든 극좌든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실체와 관계 없이 잘되면 내 공로이고 안되면 정적에게 뒤집어씌우기다. 그러나 김구 안티세력에서는 이를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란에 진압하러 갔다가 반란군이 된 제4연대장의 이름을 최남석이라고 주장하는데 저건 당시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7042&PAGE_CD=|오마이뉴스 기사]]도 있다. 실제로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8_1948_10_27_0140|오동기]] 제14연대장에서, 제4연대장이었던 [[http://www.ysinews.com/ArticleView.asp?intNum=16492&ASection=001009|박승훈]]이 후임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임 제4연대장은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9_1948_11_06_0050|이정일]][* 실제로 당시 기록은 이정일 부대로 나와 있다.]이다. 훗날 [[이성가]][* 제20연대라 나와있는데, 원래 제4연대로 여순사건 이후 제20연대로 개명됨.]로 [[http://kookbang.dema.mil.kr/kdd/ColumnTypeView.jsp?writeDate=20040103&writeDateChk=20030918&menuCd=2001&menuSeq=16&kindSeq=1&menuCnt=30917|개명]]한다. 중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국민당정부의 정보조직인 [[남의사]]에서 활동했으며,해방전후에는 [[한국광복군]]의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_detail.jsp?his_code=PV_DO&book_code=0006&item_code=003.003.000.000&keyword=%EF%A7%A1%E6%88%90%E4%BD%B3#k2hl|북평 잠편지대]] 소속이었다. 저 극우 부분은 박정희 시대에 삭제되었는데, 박정희에게 있어서도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21700329204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2-17&officeId=00032&pageNo=4&printNo=735&publishType=00020|흑역사]]였다. 당연히 박정희에 대한 부분도 삭제된다.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101100329201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10-11&officeId=00032&pageNo=1&printNo=5528&publishType=00020|#]],[[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100400329201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10-04&officeId=00032&pageNo=1&printNo=5522&publishType=00020|#]] 박정희 본인이 여순사건으로 발발한 숙군의 대상이었을 뿐더러, 극우=김구를 지칭하는 만큼 박정희로서 그냥 놔둘 일은 없었다. 자세한 것은 [[김구]] 항목의 [[김구/일생#s-6|김구의 복권 부분을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